호리 히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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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히데마사는 미노 국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발탁되어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측근을 지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575년 에치젠 일향 일규 토벌에 참여하고, 이가 난, 고슈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나가하마 성주가 되었다.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야마자키 전투, 기요스 회의 등을 거쳐 사와야마 성주를 역임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활약하고, 규슈 정벌에서 선봉 부대를 맡았으며, 오다와라 정벌 중 급사했다. 그의 영지는 장남 호리 히데하루에게 상속되었으며, 그는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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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치 미쓰히데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으며, 전략과 행정에 능하고 문화적 교양도 뛰어났지만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배 후 살해당해 그의 삶과 죽음은 역사적 논쟁과 창작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 미노국 사람 - 쓰보우치 쇼요
쓰보우치 쇼요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극작가, 문학평론가, 번역가로서, 『소설신수』를 통해 일본 근대 문학에 기여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신극 운동을 이끌었으며 셰익스피어 전 작품 번역을 완료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호리 히데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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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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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리 히데마사 |
이명 | 호리 규타로 |
별명 | 명인 규타로 |
출생 | 1553년 |
사망 | 1590년 6월 28일 |
출생지 | 미노 |
사망지 | 미노 |
계명 | 고가쿠도테츠토주인 석도철(高嶽道哲東樹院 釈道哲) |
묘소 | 조케이지(후쿠이현후쿠이시 니시키다) 해장사(가나가와현오다와라시 하야카와) 린센지(니가타현조에쓰시 나카몬젠) |
가문 | 후지와라 북가도시히토류사이토 씨족 호리 씨 |
관위 | |
관위 | 종4위하, 시종, 좌위문독 |
소속 | |
소속 | 오다 씨 도요토미 씨 |
주요 활동 | |
섬긴 해 | 불명 |
주군 |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신분 | 부교 |
참전 | 잇코잇키 전쟁 덴쇼 이가 전쟁 다카토 성 공방전 야마자키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네고로지 공략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호리 히데시게 |
형제 | 다가 히데타네, 호리 도시시게, 호리 미쓰마사 |
자녀 | 호리 히데하루, 호리 지카요시, 곤도 마사나리, 무라카미 다지마노카미 |
2. 생애
미노 국에서 태어난 호리 히데마사는 사촌 호리 나오마사와 함께 삼촌인 일향종 승려에게 양육되었다. 처음에는 오쓰 초지와 기노시타 히데요시를 섬겼다.[3]
13세에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이 되었고, 16세에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혼코쿠지 저택 건설 봉행으로 임명되어 스가야 나가요리, 오쓰 나가아키, 야베 이에사다, 하세가와 히데카즈, 만미 시게모토, 후쿠토미 히데카츠 등과 함께 일했다. 이후 점차 전장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3]
1575년 에치젠 일향 일규 토벌, 1577년 기이 사이가 토벌전 등에 참전했고, 1579년 아즈치 종론 개최에 기여했다.[3] 1581년 제2차 텐쇼 이가 전쟁에서 오다 노부타다를 따라 다케다 씨와의 다카토성 전투 (1582년)에서 공을 세워 오미국 사카타 영지를 받았다.[3]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야마자키 전투에 참전했다.[5]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칭찬받았고, 사에몬후에 임명, 오미 국 사와야마를 영지로 받았다.[5]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패배 후 네고로지 포위전, 시코쿠 정벌 (1585년) 등에서 공을 세워 에치젠 국 키타노쇼를 받았다.[5]
규슈 정벌에서 히데요시 군 선봉, 오다와라 포위전에서 포위군 좌익을 지휘했다.[6],[7]
2. 1. 초기 생애 (오다 노부나가 가신 시대)
미노 국에서 태어난 그는 사촌인 호리 나오마사와 함께 삼촌인 일향종 승려에 의해 양육되었다. 원래는 오쓰 초지와 기노시타 히데요시를 섬겼다.[3]13세에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이 되었고, 16세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혼코쿠지 저택 건설을 담당하는 봉행으로 임명되어 스가야 나가요리, 오쓰 나가아키, 야베 이에사다, 하세가와 히데카즈, 만미 시게모토, 후쿠토미 히데카츠 등과 함께 일했다. 그러나 점차 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3]
덴분 22년(1553년), 사이토 도산의 가신 호리 히데시게의 장남으로 미노국아쓰미군아카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일향종의 승려가 된 백부 호리 가모노다유 밑에서 사촌 형 오쿠다 나오마사(후의 호리 나오마사)와 함께 자랐다고 한다.[3]
처음에는 오쓰 나가마사를, 다음에는 기노시타 히데요시를 섬겼고, 에이로쿠 8년(1565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의 소년(小姓)・측근으로 발탁되었다. 16세에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가임시 거처인 혼코쿠지의 푸신 봉행을 맡는 등, 각종 봉행직을 역임하며 측근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노부나가의 측근으로는 히데마사 외에 스가야 나가요리・후쿠토미 히데카쓰・오쓰 나가마사・야베 이에사다・하세가와 슈이치・만미 시게모토 등이 있다.[3]
히데마사는 점차 봉행직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덴쇼 3년(1575년) 에치젠 일향 일규 토벌, 덴쇼 5년(1577년) 기이 사이가 토벌전에서는 노부나가 본진에서 떨어져 사쿠마 노부모리・하시바 히데요시 등과 함께 일대를 이끌었다. 이듬해 아리오카성 전투에서는 만미・스가야 등과 철포대를 이끌었다. 덴쇼 7년(1579년) 아즈치 종론 때 스가야・하세가와 등과 봉행을 맡았고, 다음 해 덴쇼 8년(1580년) 바테렌 저택의 조영 봉행을 스가야・하세가와 등과 맡았다. 같은 해, 노부나가의 하치스카 마사카쓰 앞으로 보낸 서장에 부장을 썼다.[3]
숙부인 렌쇼지 주지에게 길러진 관계 때문에, 혼간지와 교섭에 임하여 이시야마 혼간지와 화해하고 기이 사기모리로의 퇴성을 재촉하며 교섭에 분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히데마사는 혼간지 겐뇨로부터 '석도철'이라는 법명을 받았다.[3]
덴쇼 9년(1581년) 제2차 덴쇼 이가 난에서 시가라쿠 구치로부터의 부대를 이끌고, 히지야마성 전투 등을 싸워냈다. 이 공적과 아라키 무라시게 토벌, 에치젠 일향종 제압의 공적으로, 이 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나가하마성주 2만 5천 석을 받았다.[3]
덴쇼 10년(1582년) 고슈 정벌에서는 노부나가를 따라 고신에 들어가지만, 이미 오다 노부타다가 다케다 씨를 멸망시킨 후였기 때문에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아케치 미쓰히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접대역에서 해임된 후,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이를 맡고, 이 접대를 마친 후 빗추의 히데요시에게 향하고 있다.[3]
2. 2.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의 군사적 활약
1575년, 호리 히데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국 잇코잇키 공격을 지원했고, 1577년에는 사이카 잇키와 싸우며 하시바 히데요시, 사쿠마 노부모리와 함께 노부나가의 군대를 이끌었다.[3] 그는 여러 전투에서 아르케부스 부대를 이끌었다.1579년에는 아즈치 종교 토론(安土宗論일본어, ''아즈치 슈론'')을 개최하는 데 역할을 했으며,[3] 노부나가의 대표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니와 나가히데 등을 접대하기도 했다.
1581년, 히데마사는 제2차 텐쇼 이가 전쟁에 참전했고, 오다 노부타다를 따라 다케다 씨와의 다카토성 전투 (1582년)에 참전하여 오미국 사카타 영지를 하사받아 25,000 코쿠의 수입을 얻었다.[3]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 시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옛 영토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1582년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마사는 나카가와 키요히데, 다카야마 우콘과 함께 히데요시를 도왔다. 이듬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전투 능력에 대해 큰 칭찬을 받았다. 당시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전투를 시작했고, 이에야스는 그 전투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자신했다.:1582년 히데마사는 아케치 히데미쓰를 사카모토 성으로 몰아넣었고, 패배를 직감한 히데미쓰는 선조 대대로 내려온 가보를 히데마사의 가로 나오마사에게 넘겨주겠다는 뜻을 전한 후, 성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1582년
히데마사는 종5위에 서임되었고, 사에몬후(궁정 경비 사무소)에 임명되었으며, 오미 국 사와야마를 90,000 곡의 수입과 함께 영지로 받았다.:1582년 6월 27일에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마사는 니와 나가히데를 대신하여 오미 국 사와야마 성과 영지 9만 석을 하사받았다.:1582년 그 후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고, 10월 20일자 서장에는 하시바(羽柴)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히데요시의 일족 외에 처음으로 하시바 씨의 성씨를 받은 것은 히데마사였다고 여겨진다.[4]
이후 히데마사는 노부나가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잇코 종교와 히데요시의 협상을 주선했다. 렌쇼지의 주지승은 히데마사의 사촌 호리 로쿠에몬이었고, 그래서 협상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1583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히데마사는 다시 한번 히데요시 군대의 일부를 이끌었지만, 도쿠가와 군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겪었다. 오스가 야스타카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매복 공격을 받아 한동안 공격을 막아냈지만, 9,000명의 도쿠가와 주력군과 마주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584년
다음 해 히데요시는 간파쿠 (관백, 섭정)가 되었고, 히데마사는 조정에서 종4위로 승진했으며 새로운 직책에도 임명되었다. 네고로지 포위전과 시코쿠 정벌 (1585년) 이후, 그는 180,000 곡의 수입과 함께 고인이 된 니와 나가히데의 영지인 에치젠 국의 키타노쇼를 받았다.:1585년
규슈 정벌 동안, 히데마사는 다시 한번 히데요시 군대의 선봉을 이끌었다. 여러 성이 함락되고 50명 정도의 사쓰마 번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자, 그는 그들을 죽이는 대신 풀어주었다. 그는 전투 기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1587년
오다와라 포위전은 히데마사가 마지막으로 전투를 지휘한 사건이다. 그는 포위군의 좌익을 지휘했으며, 많은 뛰어난 무사들을 거느리고 주변 요새들을 점령했다.:1590년
2. 4. 시즈가타케 전투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옛 영토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히데마사는 다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히데마사는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 나카가와 키요히데, 다카야마 우콘과 함께 히데요시를 도왔고, 다음 해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의 전투 능력에 대해 큰 칭찬을 받았다.[5] 1583년(천정 11년) 4월, 히데요시는 에치젠 기타노쇼의 시바타 가쓰이에를 공격했는데, 이때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한에는 "또, 규타로(히데마사) 쪽 요새에 시바타가 덤벼들자 곧바로 전투가 벌어져 무너뜨리고 많은 적을 베어 잡았으니, 이는 비할 데 없는 훌륭한 일이라 매우 기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을 정도였다. 종전 후, 히데마사는 종5위하·사에몬후(左衛門, 궁정 경비 사무소)에 임명되었으며, 오미 국 사와야마를 90,000 곡의 수입과 함께 영지로 받았다. 그 후, 히데마사는 노부나가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잇코슈와 히데요시의 협상을 주선했는데, 렌쇼지의 주지승이 히데마사의 사촌 호리 로쿠에몬이었기 때문에 협상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히데마사는 다시 한번 히데요시 군대의 일부를 이끌었지만, 도쿠가와 군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겪었다. 오스가 야스타카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매복 공격을 받아 한동안 공격을 막아냈지만, 9,000명의 도쿠가와 주력군과 마주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아군의 군대가 대패했지만, 히데마사는 자군을 3개 부대로 나누어 여세를 몰아온 이에야스 측의 오스가 야스타카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매복, 협공하여 패주시켰다. 그 후, 이에야스 본대와는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5]
2. 5. 에치젠 국 기타노쇼 영주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되자, 히데마사는 종4위하・시종 겸 사에몬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기슈 정벌(센고쿠보리성, 제2차 오타성 전투)과 시코쿠 평정에서의 군공으로 니와 나가히데의 옛 영지인 에치젠국 기타노쇼 18만 석을 받았다. 요리키로 가가 고마쓰의 무라카미 요시아키, 가가 다이쇼지의 미조구치 히데카츠가 배속되었다.[5]2. 6. 규슈 정벌과 오다와라 정벌
1587년 규슈 정벌에서 히데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선봉을 이끌었다.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사쓰마 번 병사 50명 정도를 포로로 잡았으나, 이들을 죽이는 대신 풀어주었다. 히데마사는 이 기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6]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히데마사는 포위군의 좌익을 지휘했으며, 휘하의 뛰어난 무사들과 함께 주변 요새들을 점령했다. 하코네 방면을 공격하여 야마나카성을 함락시켰고, 오다와라 하야카와구치까지 공격해 들어가 카이조지에 본진을 설치했다.[7] 그러나 5월 하순에 역병에 걸려, 5월 27일에 진중에서 급사했다.[2][8]
3. 인물 및 평가
- "명인 좌에몬노스케"(무가사기[9]・명장언행록[11]), "명인 타로"(조산기담[10])라고 불렸는데, 이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마음을 썼기 때문이며(조산기담[10]), 혹은 천하를 지휘하여 잘못이 없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명장언행록[11]).
- 야마자키 전투 때, 덴노 산을 점령하기 위해 제1진의 호리오 요시하루가 먼저 산을 오르고, 그 뒤를 히데마사가 따라 오르려 했을 때, 가신인 호리 시치로베에가 "산 위의 아군이 만약 패배하면, 반드시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길을 바꿔서 올라가십시오"라고 간언하여 길을 바꿔 올라갔다. 그러자 과연 호리오 부대는 무너졌고, 히데마사는 그 옆에서 공격하여 적장인 마쓰다 마사치카를 조총으로 쳐 물리쳤다고 한다(명장언행록[12]). 호리 시치로베에는 사촌인 호리 나오마사의 형인 도시무네로 추정되며, 도시무네는 처음에는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섬겼고, 요시테루 사후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섬겼던 인물이다.
-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 총성이 들리고 이어서 소리가 나지 않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나카 요시마사가 한 기로 와서 "뒤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서둘러 대비를 갖추시오"라고 말하고 먼저 갔다. 히데마사는 "그 자는 깃발을 든 사무라이의 소년두이다. 그런 심부름은 단사나 젊은이가 해야 할 일이고, 스스로 올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총성에 이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아군의 패배가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과연 아군은 패배하고 오스카·사카키바라 등의 적이 덤벼들었다고 한다(명장언행록[12]).
- 규슈 정벌 때, 측근인 야마시타 진고베라는 자가 난심하여 히데마사에게 뒤에서 칼을 휘둘렀다. 히데마사는 뒤돌아보며 야마시타를 베었지만, 그때 야마시타의 뒤를 걷고 있던 나오마사도 야마시타를 뒤에서 베었다. 히데마사는 나오마사에게 "내가 먼저였다"라고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일이 급박했는데도 빨리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말했다고 한다(명장언행록[12]).
- 어떤 때, 봉행의 종자와 짐을 든 자가 짐의 무게를 다투는 것을 듣고, 히데마사는 자신이 직접 그 짐을 짊어지고 걸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저 사람보다 힘이 세지만, 1리쯤 짊어지면 피곤할 것이다. 들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하다"라고 판단했다고 한다(조산기담[10]).
- 어떤 때, 행군 중에 깃발을 든 자가 늦어져 책망받는 것을 보고, 히데마사는 자신이 직접 깃발을 짊어지고 시험 삼아 "그렇다면 자신의 말의 다리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리가 약한 말로 갈아탄 결과, 깃발 든 자는 늦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조산기담[10]).
- 위의 호리 히데마사상(초케이 사 소장)은 히데마사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라고 한다.
4. 죽음과 유산
1590년 6월 28일, 호리 히데마사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영지와 지위는 장남 호리 히데하루에게 상속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뉴스
戦国の名将堀秀政を供養福井の長慶寺
https://web.archive.[...]
中日新聞
2009-05-28
[3]
문서
蓮照寺文書
[4]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996
[5]
서적
『新修彦根市史 第1巻(通史編 古代・中世)}』
彦根市史編集委員会
2007-01
[6]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996
[7]
문서
[8]
좌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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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家事紀』巻第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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